2022. 5. 29. 10:26ㆍ구역/여의도생태
새해가 되면 1년의 신수를 점치는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1517~1578)의 저서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토정은 16세기 사람인 데 반해 토정비결이 유행한 건 19세기 후반이다. 게다가 이지함 사후 간행된 그의 유고집을 비롯해 19세기 이전 어떤 곳에도 이 책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나온 책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토정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저자가 명확하지도 않은 비결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일까?
“토정 선생님이요? 천하의 자유인이셨죠. 명색이 명문가 자제분인데 벼슬길에 오르라는 말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귀를 씻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셨다니까요. 그 뿐인가요? 머리에 구리 솥을 뒤집어쓰고 다니다가 길에서 밥을 지어먹고, 거친 삼베옷에 짚신을 신고 다니면서 장사나 일삼으시니 양반 체통에 먹칠한다고 그렇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들은 척도 안 하셨어요.”
“그 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령한 기운이 있었대요. 어려서부터 누굴 보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이는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지나고 보면 틀린 적이 없었지요. 나중에는 의약, 천문, 지리, 음양 등 여러 학문을 익히고 수행도 하시니 멀리 세상일까지 다 내다보는 탁월한 도사가 되신 거죠.”
“그 분이 마포나루에 자리를 잡은 건 우연이 아니었어요. 조선 팔도의 장사꾼과 온갖 물건들이 모여드는 이곳의 가능성을 높은 안목으로 내다보신 게죠. 이곳에 손수 허름한 토굴집을 짓고는 토정(土亭)이라 이름하시니 우리도 그때부터 토정 선생, 토정 선생 했죠. 그 집엔 노비부터 학문 높으신 분들까지 누구나 드나들었어요. 신분을 가리지 않고 격의 없이 대해주시니 병이 들거나 근심 있는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 큰 도움을 얻고는 했죠.”
“우리같이 천한 사람의 일이라면 뭐든 몸소 겪어보시려고 했어요. 농사꾼들도 천하게 여기는 장사를 하질 않나, 뱃일을 하질 않나. 심지어는 매 맞는 것까지 겪어보겠다고 느닷없이 관리의 앞길을 막아선 적도 있었어요. 관리가 노했지만, 양반이라 그냥 보내주려는데 굳이 매를 맞겠다고 자청하시더라니까요.”
“그 분 머릿속은 오로지 ‘굶주린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까’ 밖에 없는 것 같았어요. 소금을 만들거나 고기를 잡아서는 그걸 팔아 금세 곡식 수만 섬을 벌어오셔서 죄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하셨죠. 한데 언제부턴가 곡식을 나눠주는 것은 근본대책이 될 수 없다 하시고는 그때부터 농한기마다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고기잡이며 장사를 가르치셨어요. 그런 걸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볏짚을 갖다 주며 미투리라도 삼게 하셨는데 그 덕에 이 마을엔 배곯는 사람이 없어졌다니까요.”
“한 번은 토정 선생께서 큰 병에 걸리셨다고 해 마을 사람들 모두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아 글쎄 간질병을 고쳐보겠다고 일부러 병에 걸리신 게 아니겠소? 걸리고 싶다고 병에 걸리는 것도 능력이지만, 아무리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고 세상에 자기 목숨 걸고 약을 실험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답니까? 사람 아끼는 마음으로는 부처님 저리 가라고 아무튼 구제불능이라니까요.”
혼란의 시기, 이러한 그의 행적들은 그를 추앙하는 많은 사람의 입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토정에 관한 이야기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신나게 떠들었고 토정은 조선 백성들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렇게 토정은 몇 백 년 후 민중의 가슴 속에 삶의 위안을 주는 영웅으로 남아 신통한 비결서에까지 그의 이름을 남기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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